세계를 가슴에 품은 조선인, 문순득의 표류기
인문학& 역사 2011. 4. 11. 09:03 |KBS 역사스페셜 특집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되었던 홍어 장수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책으로 다시 읽게 되었다. 지금은 세계화와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동남아시아 정도는 하루 안에 비행기로 오고 가는 세상이 되었지만 200년 전 조선의 상황은 달랐음이 분명하다. 문순득은 주로 죄인들의 유배지였던 우이도에서 홍어를 팔러 출항했다가 조선역사상 최장 거리, 최장 기간을 표류한 인물이다. 그는 생사를 오고 가는 힘든 표류 속에서도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적응하며 고국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다가 3년여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문순득의 경험은 그전에도 빈번하게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표류담처럼 곧 잊혀질 수도 있었지만 마침 그때 우이도에서 유배 중이던 실학자 정약전을 만나 표류기를 들려줌으로 인해서 정약전의 글로 재탄생 하였다. 그 이야기가 바로 ‘표해시말’ 이다. 이 기록은 아우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를 통해 ‘유암총서’에 실렸고 지금까지 전해진다. ‘표해시말’은 동아시아 문화교류 측면에서 지금까지도 굉장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조선 사회에서 천한 신분으로 취급 받던 어부 문순득은 꼼꼼한 관찰과 적극적인 태도로 류큐와 다른 동남아시아의 국가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 그리고 언어를 배움으로써 지금 비교하여도 그 정확성이 놀라울 정도이다. 예를 들어, 표해시말에 기록된 류큐인의 장례 풍습은 너무나 세밀해서 오키나와의 민속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다. 또한 문순득이 8개월 동안 듣고 기억해서 기록으로 남긴 옛 류큐 언어들은 역사 스페셜 제작진의 취재로 류카 보존 회원들에게 확인할 결과 표기상의 차이는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
류큐를 마지막 항해지로 곧 끝날 것 같던 문순득의 여정이 복잡해지게 된 것은 그가 류큐의 조공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서 조선으로 귀향하려던 계획이 또다시 표류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송이라고 불리던 나라, 즉 필리핀에 도착하게 되었다. 문순득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노끈을 꼬아 여송인들에게 팔았다. 필리핀의 일반 사람들이 처음 한국인에 대해서 알게 된 계기는 제2차 세게대전때 일본군으로 강제 동원되어 간 한국인들을 통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200년 전에 문순득은 필리핀 사람들과 어울리며 마치 조선의 민간 사절단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는 마카오를 통해서 중국으로 가게 되고 결국 그리워하던 고향땅을 3년 만에 밟게 되었다.
문순득의 표류기에서 후손인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중요한 한가지는 신분 사회라는 계층의 단절 속에서도 일개 어부의 표류담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고자 한 정약전과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기초한 열린 자세는 그 시대를 떠나서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될만하다고 볼 수 있겠다. 문순득이 조선에 돌아오게 되자 그의 귀향을 가장 주목하던 이는 다름아닌 유배지에 있던 정약전과 같은 실학자였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 조선은 문순득에게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그리고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폐쇄적인 나라였다. 문순득이 표류하면서 얻은 귀한 지식의 가치를 알아준 이는 바로 실학자, 정약전이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꿈꾸고자 하는 실학자들에게 문순득의 표류담은 다름아닌 어두운 조선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적 돌파구였던 것이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문순득의 표류기를 읽으면서 단순히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모험담 정도로만 여긴다면 이 책을 반쪽만 이해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문순득의 표류기와 경험담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던 당시 실학자들의 사상적 고민과 나라를 위한 개혁의 몸부림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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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 제목도 처음 들었습니다. 필론 님 덕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순득이 필리핀까지 갔다가 어떻게 마카오를 거쳐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인지요? 그냥 남의 배를 얻어타는 식으로 해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인가요?
문순득이 류큐에 몇 달 머물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정확한 언어 기록을 남겼다니 놀랍습니다. 어부였지만 아마 똑똑한 분이었나 보네요.
책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부분이 인상 깊습니다. 필론 님처럼 시야가 넓은 분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
당시에도 표류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해주는 절차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나라와 조선이 상호간에 그런 절차로 표류자들을 돌려보내고 했는가 봅니다.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에 표류하면 청나라를 통해서 조선으로 돌아올수 있었다더군요.